Issue Brief

디지털사회 제 13호: 합리적 유권자를 찾아서

작성자
ssk
작성일
2018-10-03 05:24
조회
1688


 

합리적 유권자를 찾아서

 

하상응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민주주의, 특히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 정치제도의 성패는 국민들의 의견을 어떻게 정치과정에 잘 반영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상정하는 가장 이상적인 유권자(ideal voters)는 중요한 정치 현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유권자이다. 유권자들이 아무런 선입견 없이 중요한 현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편향없이 소화시키면서 심사숙고한 후 의견을 표출할 때, 그 유권자들은 합리적 유권자(rational voters)라고 지칭된다. 그리고 합리적 유권자 개개인의 의견이 여론조사, 사회운동, 또는 투표를 통해 정치과정에 반영된다면 건강한 민주주의 정착이 가능하다는 것이 민주주의 이론에서 규범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와 같은 합리적 유권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잘 모르는 유권자(uninformed voters)이다. 즉, 예상보다 유권자가 보유하고 있는 정치 현안에 대한 정보의 양이 적다는 것이다. 많은 유권자들은 중요한 정치 현안 자체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설사 현안의 중요성을 인지한다고 하여도 그에 대한 소신있는 판단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당수의 유권자들은 몇 개의 현안에 대해 서로 상충하는 태도를 갖고 있기도 하다. 가령 정부가 사회복지 정책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지지하는 동시에 세금을 인상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던가, 성소수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것에는 찬성하면서 동시에 여성고용할당제와 같은 정책에는 반대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이렇게 정치 현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유권자들의 비율이 크다면, 민주주의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현안을 잘 모르는 유권자들을 이상적인 합리적 유권자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최근 정치심리학과 정치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의 경험 연구들은 잘 모르는 유권자들이 민주주의에 주는 위협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현안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가질 필요가 없고, 대신 제한된 양의 정보(limited amount of information)를 정보지름길(heuristics)로 삼아 합리적 유권자와 유사한 정치행태를 보일 수 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정보지름길의 예는 정당일체감(party identification) 혹은 정치이념(political ideology)이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부동산, 비정규직, 가상화폐 등과 같은 경제 현안들이 논의가 되는 상황에서, 이상적인 합리적 유권자는 각각의 현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어 판단을 하겠지만, 정보지름길을 사용하는 유권자는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는 대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혹은 자신과 정치 이념이 유사한 정치인이 이 현안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를 보고 그 단서(cues)를 이용해 판단한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기존 연구들은 이 경우 합리적 유권자와 정보지름길을 사용하는 유권자 간에 정치행태에서의 차이가 보이지 않음을 규명하고 있다. 즉, 정치현안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는 정보지름길을 잘 이용한다면, 많은 양의 정보를 습득하지 않아도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보지름길이 항상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정보지름길은 어디까지나 완전한 정보(complete information)보다는 열등한 도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개념은 바로 동기화된 사고(motivated reasoning)이다. 동기화된 사고는 유권자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가치관 등이 정보처리 과정(information processing)에 개입하여, 객관적이고 투명한 정보처리를 방해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동기화된 사고는 대략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념 경향성과 일치하는 의견이나 논리를 자신의 이념과 상충하는 의견 혹은 논리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이전 태도 효과(prior attitudes effect), (2)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념 경향성에 반하는 논리에는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이념 경향성과 일치하는 논리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비확증 편향(disconfirmation bias), 그리고 (3) 자유롭게 정보 취득이 가능한 상황에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경향성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찾으려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 바로 그것이다. 즉, 정당일체감 혹은 정치 이념을 정보지름길로 사용하는 유권자들은 자신의 정당 혹은 이념과 일치하는 않는 정보에 덜 설득력을 느끼고, 자신의 정당 혹은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를 접하면 그에 즉각 반박하며, 자신의 정당 혹은 이념과 일치하는 정보를 무의식 중에 찾아나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정보 처리에 편향(bias)이 발생하게 되고, 결국 정치 현안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저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동기화된 사고를 하는 유권자는 합리적인 유권자가 아니라, 무의식 중에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선입견, 가치관, 이념 성향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합리화하는 유권자(rationalizing voters)”인 것이다.

이제까지 논의된 합리적 유권자, 정보지름길, 그리고 동기화된 사고는 모두 주어진 사회 및 정치 현안에 대한 정보들이 “사실”에 부합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이 경우 유권자들은 잘 알고 있는 유권자(informed voters)와 잘 알지 못하는 유권자(uninformed voters),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이와는 다른 세 번째 부류의 유권자, 즉 잘못 알고 있는 유권자(misinformed voters)가 최근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잘못 알고 있는 유권자들은 현안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합리적인 유권자와 유사하다. 하지만 이들이 판단과 결정을 위해 사용하는 정보는 가짜 뉴스(fake news) 등에 근거한, “사실”과 다른 잘못된 정보라는 점에서 합리적인 유권자와는 명백하게 구분된다.

잘못 알고 있는 유권자(misinformed voters)는 정치 관련 정보가 유통되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때문에 급속도로 증가 추세에 있다. 과거에는 얼마 안 되는 숫자의 대중매체가 정보를 독점하면서, 유권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미리 걸러 제공해 주는 수문장(gatekeeper)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해, 오늘날에는 모든 개인이 정보 제공 및 유포를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서 잘못된 정보를 미리 솎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유권자 개인 차원에서 잘못된 정보를 유통시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세력 확대를 위해 정략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적극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종종 확인되지 않은 정보, 명백히 잘못된 정보, 혹은 음모론을 유포하는 경우의 대표적인 예로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메시지들을 들 수 있다.

유권자가 정치 현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경우, 선거와 같은 중요한 상황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잘못 알고 있는 유권자를 다시 잘 알고 있는 유권자로 바꾸는 기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건강한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유권자에게 사실 적시(fact-checking)를 하여 합리적 판단을 유도할 때, 그 사실 적시 행위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찾는 작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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