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Brief

디지털사회 제 21호: 2019년 한국사회 세대갈등

Author
ssk
Date
2019-06-14 03:57
Views
702
2019년 한국사회 세대갈등:
Philosophy of History, Algorithm, and a Sociological Realism

이원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2003 – 2016 데이터 분석 결과

나는 지난 세 정권 동안 (2003 – 2016)의 한국종합사회조사 (KGSS) 데이터를 이용해 세대별 사회의식 변화 추이를 분석하였다. 여기서 세대는 59년 이전 출생자, 60 – 69년 출생자 (586), 70년 이후 출생자의 세 출생집단이다.

진보와 보수의 잣대를 들이댔을 때 세대간 차이는 항상 통계적으로 유의미했다. 젊을수록 진보적 자세를 보이는 것은 조사 기간 내내 일관성 있는 추이였다.

그러나 가장 젊은 70년대 이후 출생 세대가 특별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그룹이지만, 북한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때가 천안함, 연평도 사건이 동시에 벌어진 2009년이다. 2019년 현재 우리나라 연령 구조상, 이들은 만 49세 이하 전체에 해당된다. 이때까지 한국의 진보블럭이 민족과 노동의 양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이 두 축 사이에 탈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탈구와 분화는 출생 집단이라는 인구학적 경계를 뚫고 등장했다.

2019년의 20대 - 경제주의적 합리성

문재인 정부는 20대의 전폭적 지지를 안고 출범했다. 데이터에 나타난 젊은 세대의 진보적 성격이 표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였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이 같은 우호적 평가가 반대로 돌아섰다는 여론 조사 결과들에 정치권이 긴장했다. 사드 배치,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팀 문제를 보수 언론이 제기했을 때, 젊은 세대의 북한에 대한 자세가 원인인 것처럼 보였다. 이는 KGSS 데이터 분석과도 일치하는 인식이다. 하지만 그 해 여름 평양냉면의 유행은 젊은이들의 냉전적 북한관의 설명력을 떨어뜨렸다.
사드와 올림픽 단일팀을 관통하는 또 다른 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공정함에 대한 감수성이다. 여기서 공정함이란 개인의 투자와 노력, 상호간의 등가 교환 같은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자세이다.

이는 탄핵과 촛불의 경험과도 연결된다. 촛불의 시작은 이화여대 학생들의 정부지원교육사업 반대 투쟁이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또 그만큼 관습적인 진보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여학생들, 혹은 여성들의 주체적 자기 조직화 방식에서 여성주의적 가치를 찾는 연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동기가 이화여대라는 명문사학에 들어가기 위해 투자한 개인적이고 사적인 자원을 보호하려는 권리 주장이었다. 대오를 이룬 학생들의 뒤편엔 이들의 부모가 둘러 서 있었다. 대학 당국이 느꼈던 위기감은 여기에 있었으며, 이는 총장의 해임이라는, 8-90년대 학자추도 해내지 못한 변화로 이어졌다.

촛불의 원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박근혜로 상징되는 보수권력에 대한 대중적 분노의 저변엔 공정하지 못한 사회와 관습에 대한 염증과 이를 돌파하려는 열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공정함의 문제

이처럼 날카로운 경제주의적 합리성이 세대갈등 담론과 결합하고 있다. 이 논리는 다음과 같다.

소위 586은 경제 호황기의 결실을 독점했으나, 이를 확장하는데 실패했다. 이들은 성장의 과실을 풍족하게 소비하면서 생긴 여유로움으로, 자신의 물질적 이해와 상관 없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젊은이들에게 586의 정체성 정치나 민족주의는 "탈물질주의적 욕망"으로 비친다.

20대는 대학입시만 마치면 지긋지긋한 무한경쟁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이들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똑같은 경쟁을 반복, 답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586의 정체성의 정치나, 시민혁명-촛불혁명-통일혁명이라는 역사철학적 거대 담론은 서울에 자기 아파트가 있고, 안정된 직장을 가진 기성 세대의 한가한 취미 생활일 뿐이다. 정치적 이벤트에 어린 자녀를 무등 태워 나가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의례적 행위들은 젊은이들에게 다큐멘터리 영상 정도로 비칠 뿐이다. 이들에겐 책상 위에 놓여진 창백한 등록금 고지서가 훨씬 현실적이다 (socially real).

문제는 586이 자신들의 사치스런 취향 (expensive taste)을 공정하지 못한 방식으로 강요한다는 것이다. 상위 2분위 이상의 고소득 임금노동자들은 전문직, 대기업 화이트칼라 뿐만 아니라, 재벌 제조업의 노동자들까지 포함한다. 이들의 직업안정성을 향한 공격적 자기 보호는 젊은 세대의 노동 시장 진입을 어렵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소위 몇몇 노조를 중심으로 발생했을 거라고 알려진 취업 비리들이 이 정권에서 유야무야 넘어갔다. 몇몇 거대 공기업의 취업 비리가 수사 대상이 되긴 했다. 그러나 한결 같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범인으로 지목함으로써 피해 당사자인 젊은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공정함의 진정성을 정치적 반대자들의 비리 척결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역사철학인가, 알고리듬인가

결국 오늘날 586에 대한 젊은 대중의 불만은 정권을 잡은, 혹은 정권에 가까운 정치 엘리트들의 외연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 정치권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이들은 20대가 교육을 잘못 받았다고 대응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시민의 힘으로 극복하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가지는 역사적 필연성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이들이 80년대 배운 사회과학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80년대 사회과학은 사실상 역사철학이다. 이 관념적 태도에 따르면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며, 따라서 현재는 과거보다 우월하다. 그리고 이 우월한 현재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 같은 복음적 자세는 실제 이들이 몸으로 겪어온 엄혹한 시대와 그 안에서 굴하지 않았던 의지의 기억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반면 오늘날 20대의 역사는 무엇일까.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입시에 다다르기까지 6년간의 시간표가 제시된다. 이 시간표는 매우 복잡하고 치열한 경쟁의 규칙들로 촘촘하다. 꺼지지 않는 학원의 불빛과 전국의 출근 시간이 두 시간 늦춰지는 입시 당일의 행렬은, 젊은 세대가 체화한 제도에 대한 믿음이자 공정함에 대한 강박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이 이들의 역사이며, 이제 이 역사가 완성되지 않고 계속 반복될 것임을 깨닫는 중이다.

20대의 역사는 586의 역사보다 짧다. 20대의 역사는 사적이며, 동시에 반복적이다. 따라서 이는 역사라기보다 알고리듬에 가깝다. 짧고 부분적인 문제 해결에 특화된 알고리듬은 일정하고 항상적인 에너지의 투입을 요구한다. 이들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투입하는 이유는 한 번 짜여진 논리가 항상 그대로 구동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예측가능한 시스템 안에서 결과의 성공과 실패는 나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나는 실패의 부담을 감당하는 만큼 성공의 결실을 즐길 자격이 있다. 이 같은 규칙에 순종하는 자세는 다른 사람 또한 같은 규칙에 복속할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지탱된다. 그리고 20대는 이를 공정함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공정함은 대합입시제도가 갖는 공정함과 다르지 않다.
황현산은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라고 했다. 586세대의 정치적 감수성과 역사철학적 자세에 어울리는 말이다. 그러나 같은 논리가 한때 고생했던 민주화 세대, 인류 역사 내내 고생했던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용과 보상의 근거로 사용될 때, 20대의 분노를 자아낸다. 알고리듬은 현재에 복무하는 만큼 기원 (origin) 에 무관심하다. 이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아 탈-역사적이 된 것이 아니다. 대학입시라는 삶의 조건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사회화의 경험 속에서 알고리듬적 사고방식을 터득했다.

세대 투쟁의 사회학적 딜레마

젊은이들이 586과의 "손절"을 선언했다. 위의 논리를 따르자면 이는 586세대의 역사적 경험과의 결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대를 물질적, 문화적 주체로 인정하고 내가 속한 세대를 위한 투쟁을 개시하는 순간, 당장 해결해야 하는 갈등적 선택지들이 나타난다.

- 인구학적 연대

2019년 현재 한국의 인구 구조를 보자. 586의 사회적 권력은 이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원 독점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가장 많은 자원을 차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수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세대 이익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순간 지지자의 수 측면에서 20대는 586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투쟁을 선택한다면, 20대는 비 586세대, 특히 현재 3-40대를 구성하는 7-80년대 생들과의 연합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세대 이익의 내용과 범위가 현재 20대 담론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질 수 밖에 없다.

- 운동에서 정책으로

정체성 정치의 근본적 문제는 이것이 현실 (reality) 에 부합하냐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삼단논법을 예로 들어보자 (Ian Hacking): 1) 성구분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이 아니다 (de Beauvoir); 2) 성구분은 나쁘다 (Judith Butler); 3) 성구분을 철폐하면 우리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Monique Wittig).

이 삼단논법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자연의 필연적 법칙이 아니더라도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019년 6월 4일 미국 애리조나에서 류현진이 잡은 3개의 스트라이크아웃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의 결과는 아니지만, 현실에 존재했고 기록된 객관적 사실이다.
둘째, 정체성의 우연성과 정체성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정체성의 철폐 여부 사이에는 필연적인 논리적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성구분은 다른 성들 사이의 권력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성구분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집합적 의지가 숨어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성 자체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세대나 성 같은 개념을 구성 (construction)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 혹은 객관화 (objectification) 하는 것이다. 대상화는 개념에 대한 면밀한 정의에서 비롯하되, 인간의 집합적 활동 (경제, 제도, 법, 정치) 에 근거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

결국 세대와 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제도적, 정책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게 가능하기 위해 개인의 감수성에 기반한 사실 (actuality)이 아니라 제도에 대한 정보,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에 기반한 정책적 사실 (factuality) 을 갈고 닦아야 한다.

공공 정치라는 길고 굽은 길 (Aufgabe)

"폭력 비판"이라는 소고에서 발터 벤야민은 "나는 살인을 해도 되나?"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이는 나치 독일을 살았던 양심적이고 예민한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질문이기도 했다. 벤야민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도덕적 필연이 아니라 행동 지침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정당방위 같은 예외적인 경우, 스스로 고독한 책임을 지기로 작정한 인간이라면,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주어진 현실의 심각성과 위협성은 누가 판단하는가?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 유일한 근거라면 이것이 남용될 가능성은 어떻게 막아내는가?

주디스 버틀러 같은 정체성 정치 이론가들은 벤야민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정작 이 중요한 질문은 회피했다. 반면 벤야민의 또 다른 여성 동료인 한나 아렌트는 이 위험을 들어 폭력이 아닌 "공공 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나치즘 같은 극단적 부정의의 상황에서 개인의 고독한 결단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부정의에 맞서 일일이 폭력적 수단에 호소하는 것은 악순환만을 가져온다는 것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불안정하지만, 개인의 결단 보다 공공의 합의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에는 훨씬 유용하다는 것이 아렌트가 역사로부터 얻은 결론이었다.

토론하고 설득하면서도, 당장의 결론이 새로운 딜레마를 초래할 수 있다는 한계까지 함께 공유하는 자세야말로, 세대를 경계로 이해의 충돌이 심해지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극복하는 지난하지만 근본적인 길이 될 것이다. 이 길고 굽은 길은 역설적으로 폭력적 경쟁의 세계적 유행에 직면한 오늘날 한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에 더 간곡히 요청된다.

 

* 디지털사회(Digital Society)는 연세대학교 디지털사회과학센터(Center for Digital Society)에서 발행하는 이슈브리프입니다. 디지털사회의 내용은 저자 개인의 견해이며, 디지털사회과학센터의 공식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디지털사회] 제21호
발행인: 조화순
발행일: 2019년 6월 15일
ISSN 2586-3525(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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