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사회 제62호: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 미국의 수출통제 정책과 기술패권의 국제정치
작성자
ssk
작성일
2025-07-22 20:59
조회
266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 미국의 수출통제 정책과 기술패권의 국제정치
유인태 (단국대학교)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국제정치의 권력구조를 재편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고성능 연산을 가능케 하는 AI 반도체는 AI 생태계의 기반이자, 군사·산업·외교 전반에 걸쳐 전략적 가치가 급부상한 핵심 기술이다. 이 글은 AI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의 수출통제 정책을 중심으로, 미중 전략경쟁, 동맹국과의 조율, 기업의 대응, 중국의 기술굴기 등 복합적인 국제정치적 함의를 개관한다.
미국은 2018년 트럼프 행정부 1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대중 기술봉쇄에 착수하였다. ‘수출관리규정(EAR)’과 ‘외국산 직접제품 규정(FDPR)’은 미국 기술이 포함된 반도체, 장비, 소프트웨어 등이 제3국에서 생산되더라도 중국으로의 이전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단순한 국가 간 갈등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과 기술 생태계 전반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대표적 사례로는 화웨이, SMIC 등을 포함한 수많은 중국 기업이 미국의 '수출통제 대상 목록(Entity List)'에 등재되며 첨단 기술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를 유지하되, 더 정밀하고 제도화된 규제를 추진하였다. 2022년 10월과 2023년 10월의 두 차례 수출통제 조치는 AI 반도체의 사양 기준을 세분화하고, 슈퍼컴퓨터, 제조장비, 소프트웨어, 인력까지 통제 범위를 대폭 확대하였다. 특히 성능 밀도 등 새로운 기술적 기준을 도입해 규제 실효성을 높였고, 특정 폐쇄형 AI 모델의 가중치까지 통제하는 2025년의 ‘AI 확산 프레임워크’를 통해 국가별 등급(Tier) 시스템을 시도하였다. 이 프레임워크는 AI 반도체 기술의 국제 확산을 구조적으로 제한하고자 하는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조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강도 통제는 미국 기업들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대표적으로 엔비디아(NVIDIA)는 2022년의 수출통제를 회피하기 위해 A800, H800 등 중국 수출 전용 칩을 출시했으며, 이는 수출통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미국 정부에 지나친 통제가 기술혁신과 시장 점유율을 위협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보다 현실적이고 조율된 정책을 요구하였다. 특히 미국 기업들이 규제 대상이 되는 동안, 한국, 대만, 유럽 기업들이 시장을 점유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었다.
중국 역시 다층적인 대응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등 제3국에 위탁생산을 맡기거나, 회색시장과 유령회사를 활용한 우회 수입, 심지어 해외 데이터센터에서 대량 AI 칩을 밀반입하는 방식까지 동원되고 있다. 동시에 자체 생태계 구축도 진척되고 있다. 화웨이의 어센드910 시리즈는 SMIC의 7나노 공정을 활용하여 엔비디아 A100에 준하는 성능을 구현하고 있으며, 딥시크(DeepSeek)는 H800 및 H20을 기반으로 GPT-4 수준에 근접한 저비용 고성능 모델을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중국제조 2025' 전략 하에 AI 반도체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와 세제 혜택을 확대하며, 생태계 자립을 가속화하고 있다.
국제 협력 차원에서도 AI 반도체 수출통제는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압박에 따라 ASML의 EUV·DUV 노광장비 수출을 제한하였으나, 자국의 산업 이익과 주권을 고려해 자율적인 허가제 체계로 전환하고 있다. 일본 역시 2023년부터 첨단 반도체 장비에 대한 수출통제를 시행하였지만, 중국의 희귀광물 보복 가능성과 국내 기업의 손실 우려로 인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 시기의 미국은 동맹국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보조금 지급, 외교적 설득, 의회 차원의 압박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한 바 있다.
2025년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에는 수출통제 정책이 다시 조정 국면에 들어섰다. ‘AI 확산 프레임워크’의 이행은 보류되고 양자 협상 방식으로의 전환이 예고되었다. 이는 미국 내 산업계의 상업적 이해관계, 정부의 정책적 기조 변화, 중국 AI 기술의 부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변화는 AI 반도체를 둘러싼 기술패권 경쟁이 국제정치 구조 뿐 아니라 국내정치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AI 반도체 수출통제는 단순한 기술규제에 그치지 않고, 국가안보와 산업경쟁력, 글로벌 공급망, 동맹 조율, 국제법적 정당성 등 다양한 요소가 교차하는 복합적 정책 공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통제가 일정 부분 기술격차 유지 또는 확대에 기여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중국의 자생적 생태계 형성과 글로벌 시장 확장을 자극하는 이중적 효과를 낳고 있다. 향후 AI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은 기술(표준), 규범, 생태계를 포괄하는 전방위적 경합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 글은 「인공지능과 미・중전략 경쟁의 국제정치: 글로벌 AI 반도체 공급망과 미국의 경제적 강압을 중심으로」(유인태, 2025, 『국제정치논총』 제65권 제1호, 103-140쪽)의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음.
디지털사회(Digital Society)는 연세대학교 디지털사회과학센터(Center for Digital Social Science)에서 발행하는 이슈브리프입니다. 디지털사회의 내용은 저자 개인의 견해이며, 디지털사회과학센터의 공식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전체 0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
